몸이 좋지 않아서 잠시 잠을 청했다. 늦은 저녁에 잠들다 10시쯤에 깼던 것 같다. 몸이 완전히 나아지지 않아 언짢은 상태로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카톡 하나가 온다. 아버지셨다.
"**아 네이야기를 좀 하게 되었는데 OO 딸 XX가 너랑 통화한번하고 싶다는데 전화가능한지~"
제대로 본 적도 없던 친척 동생이 통화를 하고 싶다는 것. 문자 그대로 친척 동생의 의사가 반영된 것인지, 혹은 수 십 년간 보지 않고 지냈던 고모의 생각이신지는 알 길이 없었다. 전화를 걸었고, 혼란스럽기만 했다. 가족일 수는 있지만 지금껏 가족이라 여기지 않았던 이들의 목소리. 친할머니의 장례식을 기회로 예기치도 못한 장이 펼쳐졌다. 같은 피는 이리도 기묘한 것인가?
아버지 외 친가 쪽과는 모든 연을 끊고 지낸지 오래. 전화 너머 처음으로 직접 이야기를 나누게 된 친척들은 신기하면서 동시에 불편했다. 고모와 작은어머니, 그리고 셋이나 되는 사촌 동생들. 고모는 그래도 어릴 적 기억이 있으니 친근하게 보고 싶다며 긴장을 풀어주신다.
"이럴 때 얼굴 한번 보고, 모든 게 풀어져요. 고민 깊게 하지 마시고, 저질러서 오세요."
처음 이야기를 나누니 존댓말로 나긋하게 말씀하시는 작은어머니셨다.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이미 아버지께 들었지만 장례식에 갈 생각은 일절 없었다. 모든 인연은 끊어진 상태였고 돌이킬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기억과 경험을 바탕으로 했을 때 친할머니는 내겐 원망의 대상이다. 거부하고 부정하고 싶은 뿌리와 피였다. 그렇게 수십 년을 외면했다.
"할머니께서 **을 많이 이뻐하셨어요. 그래서 이렇게 부담을 주는 거예요."
이어진 작은어머니의 말씀으로 통화는 마무리되었다. 그래. 글자도 제대로 모르던 손자한테는 분명 잘 해주셨지. 단편적인 기억들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분명 나를 미워하신 것은 아니다. 손주를 미워할 할머니가 몇이나 있겠는가. 확실히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원래 있던 일정을 다급히 취소하고, 차편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아픈 몸을 밤을 새워가며 회복했고, 오전 7시 15분 용산역에서 출발하는 KTX를 타고 전주로 향했다. KTX의 일반석. 여수EXPO행 열차를 탄 동승객들. 저마다의 이유로 몸을 실었겠지. 심심함을 덜어줄 책 한 권, 읽는데 이런저런 표시를 도와줄 샤프 한 자루, 코로나19 때문에 항시 착용하는 마스크. 쏟아지는 졸음을 뒤로하고 약 1정거장이 남은 상황. 어떤 말이 오가게 될까. 옳은 결정을 내린 걸까. 수많은 생각이 오고 갔다.
해결하는 것이라고, 상처받은 뿌리를 확인하는 것이라며 큰 결정했다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글쎄. 이번 장례식은 순전히 나의 아버지를 위해 가는 것이었다. 아버지께서 무안하지 않으시도록. 장손이라는 놈이 장례식에 나타나지 않아 친인척들이 실망하는 모습을 안겨드리고 싶지 않았기에.
확실히 내키지 않는 발걸음이다. 내심 그들과의 지속적인 교류가 형성되는 것은 원치 않았다. 내게 있어 가족이라는 개념은 삶의 지분율을 크게 차지하지 않는다. 친가나 외가나 개별적으로 갈등의 골이 깊었던 것도 배경이 될 것이다. 그렇게 적정한 관계로 유지되어온 지금과 같은, 친인척 스트레스 없이 즐기는 빨간 날의 명절을 바랐다. 그런데 이제 그 벽이 허물어질 위기에 놓였다.
위기는 기회일 수도 있듯, 그래도 가족이어서일까? 반가웠다. 그리고 어색했다. 시끌벅적한 가족들에게 둘러싸이는 느낌이 얼마 만인가? 모두들 내게 잘 와주었다며 감사함을 표했다. 내가 뭐라고. 오랜 기간 없는 사람 취급하며 대한 당신들에게 이런 환영을 받아도 되나 싶었다. 감사와 어려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할머니의 영정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억 속에 계셨던 그분의 모습에 비해 많이 늙으셨다. 동생 중 하나가 말하길 할머니께서 항상 내 얘기를 하셨단다. 언젠가 한번 꼭 나를 만나보라고. 할머니께서 가신 후에야 우린 만날 수 있었다. 이렇게라도 왔으니 할머니께서 좋아하실 거라고 동생이 말한다. 입관식을 통해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원망과 죄책감이 복잡 미묘하게 섞여 요동쳤다. 내내 그런 마음으로 장례식을 치렀다.
밥 한 끼 꼭 하자는 동생의 말, 1년에 한 번은 얼굴 보자는 고모의 말씀. 하루아침에 생각을 바꾸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한편으로는 거부감도 덜해졌다. 저지르고 보니 정말 조금은 풀어지게 된 것 같다. 고모, 고모부, 작은어머니, 세 명의 동생들. 졸지에 가족이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