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의 다섯 곡을 (순서대로) 들으며 글을 일독하길 추천드립니다.

한 살 두 살 나이 먹는 일에 연연하지 말자고 되뇌이지만, 앞자리가 달라지려니 마음이 머리를 못따라가나 보다. 통제의 10대를 지나 방종의 시기에 들어선 20대,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 열렬한 영향을 주고받던, 그리고 이제 또 다른 차원의 책임과 자유를 떠안을 목전에 있는 이 10년을 어떻게 그냥 보낼 수 있을까? 대서사시를 아무 기록 없이 보내기엔 헛헛함이 크다. 뭐든, 의미부여가 중요한 것이니까.

아이유도 비슷한 심정이 아니었을까? 정규 5집 [LILAC]에서 그도 20대의 마지막에 ‘화려한 인사’를 전했고 대중은 화답했다. 이쯤에서 비슷한 나이의 멤버들로 구성된 밴드, DAY6(이하 데이식스)를 불러오고 싶다. 아련한 멜로디의 ‘예뻤어’로 유명한 그들이지만, 데뷔 이후 약 7여년 간 그들이 지은 노래가 온통 사랑노래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내가 아이유를 좋아하는 이유는 데이식스를 좋아하는 이유와 맞닿아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주 다른 사람이면서도, 세대라는 큰 울타리 안에 묶여있다. 그래서인 것 같다. 그들의 노랫말에서 나의 회한과 희열을 동시에 찾는 일이 잦았던 것이.

남겨둘게 │DAY6

현란한 기타 전주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밤 하늘을 수놓은 유성을 떠올리게 하고 이세계로 진입하는듯한 느낌을 준다. 「너의 이름은」이 과거세계와의 연을 이어주었듯, 「남겨둘게」도 현실을 잠시 잊고 지난 10년과 눈을 맞추려는 모양이다. 기타 전주가 잦아들면 느린 템포로 전개된다.

‘이제 흘러 지나가는 시간 속에 넌 희미해져 가 (이제 서서히 바래진 사진 속에 넌 흐릿해져 가)

기억 속에서마저 널 잃을까봐 난 두려워 (시간만큼은 멈출 수는 없기에 안타까워)

네가 내게 준 순간들은 너무 소중했기에 (네가 내게 준 추억들을 잊고 싶지 않기에)
I’ll remember’

이 곡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단어는 ‘미련’이다. 희미해져 두렵고 흐릿해져 안타깝기만 한 과거는 쉽게 놓아지지 않는다. 하지만 화자는 애써 잊으려 몸부림치지 않는다. 되려 기억하겠다는 용기가 퍽 인상적이다. 스물이 갓 지나고 우리는 참 많이도 서툴렀다. 하루는 조심스럽다가도 또 하루는 경솔해 자주 마음에 생채기를 내곤 했다. 적당한 거리를 찾지 못하던 그 어리숙함은, 한참이 지난 지금 떠올려도 괴로워 지우고 싶은 일이다.

‘후회 없이 사랑했기에 널 내 안에 남겨둘게’

그런 과거를 잊으려 하지 않고 내 안의 ‘일부’로 남겨두겠다는 담담함은 비로소 성숙을 암시한다. ‘후회 없이 사랑했기에’ 남겨두겠다는 말은 곧, 낯선 세상 속 미숙하게 행동해야 했던 나를 원망하기보다 오히려 치열했던 나를 끌어안겠다는 말과 다름없다. 마침내 20대에 ‘뜨거운 안녕’을 고할 준비가 된 듯하다.

구름 위에서 │DAY6 

하지만 한 곡으로 미련을 전부 씻기에 10년은 길다. 「구름 위에서」 도입부에 들리는 바람 소리는 자못 아쉬움 섞인 한숨처럼 들린다. 누구에게나 평생 잊히지 못할 것 같은 사건은 있다. 이 곡은 그런 과거마저 털어내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어젯밤 꿈에 나타난 너는 하늘 위를 날고 있었어

닿을 수 없는 거리를 둔 채 그저 바라보다 깼어 (…)

자전거를 타고 멀리 가자던 날 얼마 못 가 고장이 나서

돌아가던 길 넌 하늘을 보며 저 새들이 부럽다 했지’

이 곡을 지은 Jae는 오래 전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친구를 그렸다고 전했다. 이제는 꿈에서밖에 볼 수 없는 친구가 마침내 그토록 부러워하던 새처럼 날아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세상엔 떠나간 사람의 나라 너머에 남은 사람의 나라가 있다. 그 나라에는 매일 밤 천장에 얼굴을 그리는 사람과 초점이 흐린 채 길을 걷는 사람, 낯익은 길을 일부러 돌아가는 사람 그리고 마음 속으로 편지를 썼다 지우길 반복하는 사람이 산다. 우리 모두 그런 나라에 살았다.

‘이젠 떠난 널 떠올리며 아파하기보다

함께 했었던 그날들을 다 추억하며 웃어보려 해”

하지만 후렴구, 네가 더 이상 없는 현재를 슬퍼하기보다 네가 있어 다행이었던 과거를 추억하려하는 의지는 성진의 보컬로 절정에 이른다. 소년스러운 목소리는 아직 온전히 보내줄 수 없지만 애써 보내주려는, 그래서 벅찰 수밖에 없는 마음을 남김없이 드러냈다. 노래 말미에 다시 한 번 부는 바람 소리로 화자의 마음엔 비로소 후련한 여유가 생긴 듯하다.

역대급(Walk) │DAY6(Even of Day)

톤을 바꿔보자. 「역대급(Walk)」은 우리가 20대를 지나며 겪어왔고 또 겪고있는 수많은 ‘역대급’ 파고를 대하는 태도에 관한 노래이다. 이 곡은 전반부, 중반부, 후반부 등 세 개 파트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이야기를 다룬다.

‘몇 년 전에 찍었던 사진 꺼내보며 그때가 좋았지,

생각해버렸지만 사실 그때도 힘들긴 했어’

망각의 동물 우리는 과거에 대해 꽤 오만한 자세를 취한다. 대학생일 적엔 입시에 찌든 고등학생이, 고학년이 돼선 불안했던 새내기와 심지어 나라의 통제 하에 있는 군인까지도, 그리고 사회초년생일 땐 매일을 좌절하는 취준생까지 부러워하지 않나. 이쯤되면 과거의 자아가 찾아와 멱살 잡고 흔들어도 할 말 없다. 

‘(Why) 지금이 언제나 (Why) 제일 힘들어보여

그건 변치않아, 누구나 다 느끼잖아’

사실 이토록 과거를 미화하는 건 현생이 어처구니 없이 어렵기 때문이다. 한 고비를 겨우 넘으면 더 높은 산을 마주해야 했다. 끊이지 않고 우리 앞에 나타나는 난관을 두고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실소를 뱉는 정도밖에는. 세상을 수식할 단어로 이것저것 모으다 추렸을 때, 어쩌면 결국 ‘불확실성’, ‘예측불가능성’, ‘무질서도’ 같은 단어로 요약될지 모른다고 생각해왔던 것 같다.

‘어차피 매번 역대급일 거니까 정신 차려, 인마

Keep walkin’, Keep walkin’

아무리 준비해도 상상도 못한 게 다가올 테니까 신경 쓰지마

Keep walkin’, Keep walkin’

가고 싶은 대로 가 (…)

걸음마를 뗀 그 순간부터 나의 걸음이 멈춰질 때까지 (…)

계속 걷는 게 운명인 거라면 원하는 대로 가고 싶은 대로 가’

하지만 「역대급(Walk)」은 낙담과 자조에 그치지 않는다. 한편 이들은 2년 전 미니 5집 「The Book of Us: Gravity」의 수록곡 「돌아갈래요」에서 호기롭던 과거가 부러워 죽겠다며 돌아가고 싶다고 떼를 쓰기도 했다. 2년이 지나 발표한 미니앨범 「Right through me」에서는 그 대신, 위로를 전하는 편을 택했다. 어차피 상상도 못한 역대급의 시련이 펼쳐질 인생, 계속 살아야 한다면 ‘가고 싶은 길을 가자’는 말은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비관적인 현실진단 위에 꽃피운 낙관적 대안이라니, 이 모순적인 신념은 「역대급(Walk)」을 알고부터 마음 속 깊이 뿌리내렸다.

You Make Me │DAY6

「역대급(Walk)」이 제안한 걸음에 ‘함께 하자’고 말하는 「You Make Me」는 황무지 풍경을 연상케 하는 전주로 시작된다. 아무도 없이, 소리 치면 메아리만 돌아올 것 같은 황무지에 홀연 불어오는 휘파람 같은 도입부다.

‘아무도 없는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면 소리가 날까?’ [1]

그런 꿈을 꾼 적이 있다. 나를 둘러싼 주변에 사람이 그렇게 많았는데, 귀가 그렇게 많았는데도 내 외침이 전혀 닿지 못하던 꿈을. 고래고래 소리 질러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내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꿈을. 아침에 깼을 때 목이 칼칼하던 느낌은 아직까지 생생하다. 그리고 꿈은 반대라고 하지만 현실이 꿈보다 더했던 날도 많았다.

‘놓지 말아줘,

네가 있다는 게 나에게는 마지막 희망 한 줄기의 빛이니까 (…)

붙잡아줘,

살아 있다는 게 두렵고 버겁긴 하지만 견딜 수 있어,

오로지 너의 그 사랑이 있다면’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지난 10년 그런 꿈을 꾸던 날들만이 짙지는 않았다. 예기치 못한 때 손을 잡아주던 사람도, 돌아보니 꽤 오랫동안 나를 지켜봐준 사람도 있었다. 스물이 되고 아홉 해가 지나고서야 비로소 어른이 돼가는 것 같은데, 도무지 삶은 잘 풀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두 발 딛고 이 황무지에 서있을 수 있었던 건 그들 덕이다. 그리고 「You Make Me」는 닿지 못하는 외침과 뜻하지 않은 위로를 모두 겪은 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나는 난다고 생각해

언젠가는 닿을 거라고 생각해

누군가는 꼭 들어줄 거라고 생각해’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 │DAY6

다가올 30대가 마냥 꽃밭일 순 없겠지만 누구 말대로 파티는 네버엔딩일 테다! 지난 20대의 미련도 충분히 털었고, 가고 싶은 길을 가되 함께 걸을 친구도 찾았으니 이젠 두 팔 벌려 축제를 즐길 일만 남았다.

노래의 시작을 알리는 심벌 소리에 이어지는 청량한 건반 소리를 듣다보면 드럼과 기타가 존재감을 드러낸다.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는 데이식스의 수많은 노래 중에서도 악기 어느 하나 묻히지 않고 모든 악기가 잘 들리는 노래 중 하나이다. 그래서인지 무대 위 멤버들도 그 어느 때보다 라이브를 가장 즐기는 듯한 인상이 두드러진다.

‘아름다운 청춘의 한 장, 함께 써내려가자

너와의 추억들로 가득 채울래

아무 걱정도 하지는 마, 나에게 다 맡겨 봐

지금 이 순간이 다시 넘겨 볼 수 있는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

‘서른’이라 하면 놀림감 되기 십상이지만 사실 내게 서른은 아직 한창 같다. (마흔이 되면 달라지겠지) 흔들리고 부서졌던 20대로부터 나는 이제 멀리 와 있다. 어쩌면 인생은 파친코일지도 모른다는 자각과 동시에 가치관이 또렷해졌고, 혼란한 마음을 잠재울 습관도 가지게 되었다. 다만 넌씨눈을 비롯한 빌런들이 삶을 흔들려 할 때 조금은 더 의연한 마음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여전히 유효하다.

여하간 그런 의미에서 청춘 제2막을 즐길 생각에 어쩌면 들뜨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또 좋은 사람들과 즐길 이 10년 축제의 시간이 ‘뒤베르제 평전’의 한 페이지 또는 한 챕터를 흥미로이 채우길 기대한다.

[1] KBS 드라마스페셜 「아득히 먼 춤」 중에서